알프레트 로젠베르크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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알프레트 로젠베르크

알프레트 에른스트 로젠베르크(독일어: Alfred Ernst Rosenberg, 1893년 (율리우스력 1892년 12월 31일) 1월 12일~1946년 10월 16일)는 나치당의 정치가이자 인종 이론가이다.

에스토니아의 수도인 탈린에서 발트 독일인의 후손으로 태어났고, 리가모스크바에서 건축을 전공했다. 1917년 러시아 혁명이 발발한 뒤 독일로 이주해 훗날 나치당 기관지가 된 푈키셔 베오바흐터에서 근무했고, 툴레 협회의 회원으로 활동했다.[1][2]

이 기간 동안 휴스턴 스튜어트 체임벌린 등 인종주의자들의 저서를 연구하면서 반유대주의반공주의를 공개적으로 천명하기 시작했다. 1923년 뮌헨 폭동이 실패로 돌아간 뒤 수감된 히틀러를 대신해 잠시 나치당을 이끌었고, 푈키셔 베오바흐터의 편집장도 맡았다.[3][2]

그는 반유대주의 사상의 체계화와 보급을 위해 '유대인 문제 연구소'를 1939년에 설립했고, 자신의 인종 이론을 서술한 '20세기의 신화'라는 책을 간행하기도 했다. 그러나 히틀러는 사석에서 그 책을 그다지 높이 평가하지 않았고, 오히려 조야한 잡문 정도로 깎아내리기까지 했다.[4][5]

나치 집권 후 로젠베르크는 자신의 이론을 바탕으로 선전성 장관이었던 요제프 괴벨스와 세력 다툼을 벌였고, 인종 문제 뿐 아니라 문화예술 분야에까지 간섭하면서 정면 대결로 번졌다. 그러나 결국 히틀러가 더 높이 평가한 괴벨스가 사실상 로젠베르크의 작업을 점유하게 되었다.

2차대전 중에는 점령지의 미술품 등을 독일로 빼돌리는 작전을 주도했고, 독소전쟁 시기에는 동부 점령지의 장관으로 임명되었다. 로젠베르크는 반제 회의에서 결정된 유대인 문제의 '최종적 해결(홀로코스트)' 을 맡게 되었으나, 이미 아인자츠그루펜을 학살에 동원하고 있던 하인리히 힘러 휘하의 무장친위대와 세력 다툼 끝에 밀려났다.[6]

종전 직전 연합군에 의해 전쟁범죄자로 체포되었고, 뉘른베르크 재판에 회부되어 기소된 모든 혐의에 대한 유죄 판결을 받고 교수형에 처해졌다. 유해는 다른 사형수들과 마찬가지로 다하우 강제 수용소의 소각로에서 화장되어 이자르강의 한 곳에 익명으로 뿌려졌다.

각주[편집]

  1. Piper 2015, 21쪽.
  2. Hiio 2018.
  3. Cecil 1972, 6쪽.
  4. Kershaw, Ian (2000) Hitler, 1889-1936: Hubris, W. W. Norton & Company. pp.138-139. ISBN 9780393320350
  5. Kellogg 227–228
  6. “Alfred Rosenberg Diary - United States Holocaust Memorial Museum”. collections.ushmm.org. 2015년 8월 16일에 확인함. 

참고 문헌[편집]

같이 보기[편집]

외부 링크[편집]